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징웨이 정권 (문단 편집) === 정부 수립 이전 === [[중일전쟁]]이 시작된 이래 [[왕징웨이]]는 줄곧 일본과의 평화를 주장해왔다. 결국 [[왕징웨이 공작]]에 따라 왕징웨이가 충칭에서 쿤밍, 하노이를 거쳐 일본이 점령한 난징으로 탈출한 후인 1939년 2월 초부터 시국을 수습하는 방법 세 가지로 일본과 장제스가 타협하는 방법, 왕커민, 량훙즈, 우페이푸 등 친일 정치인이나 정권을 중심으로 통일정부를 구성하는 방안, 자신을 중심으로 통일정부를 구성하는 방안 등을 내놓으며 본격적으로 신정부 건설의 준비 단계에 들어갔다. 그러나 일본은 왕징웨이를 불러오긴 했으나 처음부터 왕징웨이의 국민당이 주축이 된 신정부를 수립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때문에 정부 수립 과정에서조차 왕징웨이는 그의 구상과 다른 방식으로 정권을 수립할 수밖에 없었다. 왕징웨이는 초반에 [[쑨원]] 이후 잘 개최되지 못하였던 국민 회의를 개최하여 [[중국국민당|국민당]]의 정통성이 자신의 정권에게 있음을 알리고 그를 통해 국민당의 새로운 정통정권이 수립했음을 선포하려고 하였으나, 일본군과 점령지 중국을 이미 통치하고 있던 양 괴뢰정부의 반발에 부딪히게 된다. 두 괴뢰정부의 지도층은 그들의 신 왕징웨이 정부에서의 지분을 요구하였고, 결국 왕징웨이의 국민당이 1/3, 임시정부와 유신정부 인사가 1/3, 몽강연합자치정부 및 기타 당파가 1/3씩 차지하는 중앙정치회의를 구성하여 통합하기에 이른다. 또한 왕징웨이는 [[중화민국 유신정부]]와 [[중화민국 임시정부(괴뢰정부)]], 더 나아가 [[만주국]]과 [[몽강연합자치정부]]까지 아우르는 전 중국의 통일된 정권을 세우려 했지만 [[만주국]]은 왕징웨이의 구상을 극렬하게 반대한 [[관동군]]에 의해서 그대로 유지되었고 [[내몽골]] 지역은 형식상으로는 왕징웨이 정권 소속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북지나방면군의 비협조로 몽골자치구로 격하된 [[몽강연합자치정부]]가 그대로 통치하는 형태였으며 화북 또한 1939년 12월 체결된 <일화신관계조정요강>으로 명목상으로 왕징웨이 정권에 편입되지만 사실상 '화북정무위원회'라는 별개의 조직으로 운영되기에 이른다.[* 북지나방면군은 육군 내 온건파들이 멋대로 추진한 왕징웨이의 괴뢰정권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북지나방면군은 내몽골과 화북은 소련과의 전쟁을 대비한 특별 구역으로 지정해야 한다며 협조를 거부했다.] 1939년 7월 왕징웨이는 방송 연설에서 "중국혁명의 성공 여부는 일본의 양해에 달려 있다"는 쑨원의 말을 인용해 일본과 협력하는 것이 쑨원의 뜻이라고 선언했다. 8월 28일에는 상하이에서 [[https://en.wikipedia.org/wiki/6th_National_Congress_of_the_Kuomintang_(Wang_Jingwei)|국민당 제6차 전국대표대회]]를 소집하여 충칭의 국민당에 맞서는 새로운 국민당을 구성함과 동시에 자신들이 "순수한 국민당"이며, 충칭의 국민당에 해산 명령도 내렸다. 왕징웨이가 쑨원의 정통성을 잇는 인물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어찌나 강조했는지 신정권 수립이 쑨원의 생일인 11월 12일에 이루어질 것이라 예상한 사람까지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